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문단 편집) == 경제 ==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external/www.dailystormer.com/nazi_autobahn.jpg|width=100%]]}}} || || {{{#ffffff '''나치 독일 시기 건설된 [[아우토반|{{{#ffffff 아우토반[* 일자리 창출과 물류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지은 고속도로로, 전시 상황에는 군용기에 활주로로 이용 할 수 있게 중간중간에 도로 옆에 군용기를 위한 주기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5kj0iosfEiM)]}}} || || {{{#ffffff '''1941년의 [[베를린|{{{#ffffff 베를린}}}]]'''}}} || 나치는 [[대공황]]을 해결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대공황의 여파부터 해결해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업률이 30% 수준으로 경제가 최악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공공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수백 만의 고용 인력이 창출되었고, 독일의 실업률은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독일 국가 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는 [[메포어음]](Mefo-Wechsel)을 발행해 재정 적자를 해결해나갔다. 나치 정부가 기업에 상품을 발주하게 되면 나치 정부는 기업에 화폐 대신 이 메포어음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독일 국가 은행은 화폐를 추가로 발행함으로써 감내해야 하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었다. 나치 지도부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약속만 있는 메포 어음으로 단기간에 빠른 경제 성장과 군사력 증강을 이루어냈고, 독일 기업들도 이자가 좋은 메포 어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였다. 그 덕에 [[전간기]] 기간 동안 무려 204억 마르크의 메포 어음이 발행되었다.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867620477|#]] 한편, 나치는 기업과 [[정경유착]]을 단행했고 [[협동조합주의|기업들과 노조간의 단체 교섭을 중단하고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동결하고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막대한 편의와 혜택을 부여했다.[* 그래서 1930년대 초반과 비교해서 1939년에는 독일의 임금 수준이 평균적으로 25% 가량 적었다고 한다.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들의 임금 수준이 저임금 일자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치당에서 이러한 불만을 감지못한것은 아니라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여가생활을 누릴수있거나(기쁨을 통한 힘) 염가에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보급시키는 식으로 불만을 해결하려 했다. ][* 사실 이렇게 해서 산업 부양력이 급등할 수 있긴 했으나, 문제는 정경유착을 형성한 기업들이 뒷돈을 해먹기 바빴기 때문에 결국 전쟁 후반에는 생산 효율이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공공기업들이 민영화되었고 재벌들이 형성된다. 특히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에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독일 기업들은 나치의 군비 증강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이 금융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고, 이에 따라 독일 증권 거래소는 폐쇄되고 독일인의 외국 주식 거래를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기도 했다. 나치 정부의 이러한 노력 덕에 독일은 단숨에 유럽 1위이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https://www.quora.com/When-did-Germany-become-Europes-largest-economy|#]] 그러나 원자재가 부족한 것이 약점이었고, 또한 민간 노동 시장 창출을 위한 지출의 3배 이상, 독일 국민 소득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군사비 때문에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내하고서라도 추가적인 화폐 발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국가 예산을 훨씬 상회하는 정부 지출이 발생해 나치는 막대한 부채에 당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메포 어음을 막대하게 발행하긴 했는데 막상 독일 기업들에게 보증한 대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 [[얄마르 샤흐트]]는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를 회생시킬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지만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전시경제-약탈경제로 자국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생각에 전쟁을 통해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메포 어음을 받은 독일 기업들에게 보증한 대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뒤로 독일은 점령한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국부와 자원, 노동력을 몽땅 약탈해가 경제력에 투입했으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 지대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유대인, 반체제주의자, 전쟁포로 등을 [[강제수용소]]나 기업들에 배치해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나 독일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의 경제도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전 이후 전시경제로 전환되고[* 나치 정권은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국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합법적 정통성은 있으므로 쿠데타나 외세의 힘 등으로 집권한 정부에 비해 안정적이고 당당하므로 정권이 불안정하지는 않지만 선출을 통한 집권의 근원이 국민들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국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의 [[트라우마]]로 총력전 체제를 혐오했고, 나치 정권은 그런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해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을 일부러 늦췄다.] 기존의 비효율적이었던 생산력도 급속도로 증가되긴 했으나 1944년 기준으로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국민 소득의 75%까지 오르게 되며 그 부담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주요 산업 단지와 도시들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과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초토화되었다. 거기다가 특히 취약한 원유 수입을 비롯한 원자재는 [[루마니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 두 나라들이 소련군의 공격에 의해 점령 당하게 되면서 독일의 생산 능력은 극도로 급감했다. 게다가 군수 무기 생산에 필요한 [[크로뮴]], [[니켈]], [[몰리브데넘]], [[망간]] 등의 주요 희귀 금속들이 고갈되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 정상적으로 무기들을 생산할 수 없었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Dresden-Bombing.png|width=100%]]}}} || || {{{#ffffff '''초토화 된 [[드레스덴|{{{#ffffff 드레스덴}}}]]'''}}}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Berlin34.jpg|width=100%]]}}} || || {{{#ffffff '''폐허가 된 [[베를린|{{{#ffffff 베를린}}}]]'''}}} || [[1945년]], 독일의 주요 도시는 [[전략 폭격]]에 더해 연합군과 소련군의 진격 아래에 철저히 파괴되었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 당하면서 독일의 경제와 사회는 처참하게 완전히 붕괴되었고 유럽의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결국 나치 독일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침략 전쟁을 결정했으나, 그 전쟁으로 오히려 경제가 철저히 파괴 당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